[김명희 기자]
▲ ?정학당(금오서원 강당)
ⓒ 김명희
경북 구미시 유학길 593-31(선산읍)에 금오서원이 있다(지난 12일 방문).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 때 없어지지 않았던 47개 서
바다이야기5만 원 중 한 곳이다. 1572년(선조 5) 길재를 기리기 위해 금오산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것을 1602년 현 위치에 재건했다.
금오서원의 강당과 사당은 국가 보물이다. 두 보물의 공식 이름은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正學堂)'과 '구미 금오서원 상현묘(尙賢廟)'로, 상현묘의 '묘'는 사당을 뜻한다.
릴게임바다이야기 상현묘에는 길재·김종직·정붕·박영·장현광 다섯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 유신 길재는 '충의'의 화신
야은 길재(1353년, 공민왕 2- 1419년, 세종 1)는 고려 말·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이색의 문인인 길재는 고려 왕조의 명운이 다할 것을 예견해 일짝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다. 즉 정치적 업적을
바다이야기고래출현 크게 남긴 바 없지만 패망해가는 고려에 대해 절의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는 조선 지식인들에 큰 감명을 남겼다. 대체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삼은으로 통칭되며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인식된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오징어릴게임 개성은 고려 오백 년 동안 왕도였다. 궁궐이 있는 서울이라면 사람과 재화가 풍성하게 넘쳐야 한다. 하지만 길재는 혼자서 말 한 필을 타고 쓸쓸하게 도성을 배회하고 있다. 산천은 옛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데, 학문과 지위를 뽐내던 인물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가. 다들 이성계 권력에 빌붙었단 말인가. 아아, 고려 5
릴게임몰메가 00년 태평성대가 흘러간 꿈만 같구나.
▲ ?상현묘(금오서원 사당) 안
ⓒ 김명희
부관참시로 기억되는 사림 영수 김종직
김종직은 길재로부터 이어지는 사림의 맥을 이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다. 김종직은 세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글을 남김으로써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가 양성한 많은 제자들은 뒷날 조선 정계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그들을 '사림파'라 한다. 김종직은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불 피우지 못하는 한식에 봄 일도 많다(禁火之辰春事多)꽃내음 살피는 것도 농가의 할 일이지(芳菲點檢在農家)비둘기가 꾸우꾸우 산사나무 잎에서 울고(鳩鳴穀穀?棠葉)나비는 느릿느릿 장다리꽃에서 날고 있다(蝶飛款款蕪菁花)
비둘기가 산사나무 잎에서 우는 것과 나비가 장다리꽃에서 날고 있는 것은 지금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농부도 봄을 맞으면 그때 꼭 해야할 일들이 있다. 옛날에는 그것을 시무(時務)라 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얼굴을 씻어야 하고, 젊은 시절에는 공부를 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다운 삶이다.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은 정붕
정붕은 25세(1492년)에 급제해 교리로 있던 1504년(연산군 10) 유배되었다. 날마다 사냥을 다니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는 연산군을 바로잡아 보려다가 곤장을 맞고 동해안 영덕으로 쫓겨났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지만, 간신배들이 조정을 휘젓는 것을 보고 낙향했다. 중종과 영의정 성희안의 강권을 못 이겨 청송부사로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붕을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중략) 길재·김숙자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고, 이황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라고 소개한다. 그의 시 중 '분유(?楡, 느릅나무)'를 감상해본다.
동신단 느릅나무 무더위 들지 않고(酷熱不來社上?)신비해라 가지와 잎에 바람이 일어나네(神枝仙葉動風斤)요사스런 뱀 숨는 걸 요즘 사람들이 봤건만(妖蛇避穴今人見)옛노인들은 학이 둥지 찾았다고 말하네(氷鶴尋巢故老云)우뚝 버텨 서서 겨울 추위에도 숨 쉬는 듯(落落氷霜如吐納)때때로 상쾌한 바람을 은근히 일으킨다네(時時爽?發慇懃)마을 입구에 홀로 우뚝 선 저 큰 나무는(村邊獨立將軍樹)여름철 글 지을 벗 안 모일까 걱정하네(當夏恨無會友文)
이 시의 주제는 마지막 행의 '글 지을 벗 안 모일까 걱정'이라는 구절에 있다. 흔히 '사람은 그 벗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여름철에 크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마을 어귀 거대 고목 느릅나무도 공부에 성심을 다하는 벗들이 모여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분유'는 좋은 친구를 사귀어 서로 배우면서 커가는 것이 지혜롭고 정겨운 삶의 자세라는 점을 깨우쳐주는 시이다.
▲ ?상현묘(금오서원 사당)
ⓒ 김명희
문무를 겸비한 박영, 의술도 뛰어나
박영은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20세이던 1491년(성종 22) 무과에 급제했다. 1494년 성종이 붕어하자 낙향해 정붕에게 <대학>과 경전을 배웠다. 1510년(중종 5) 삼포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조방장을 맡아 창원에 부임했다. 1516년 강계 부사, 1518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영남좌도 절도사로 재임 중 세상을 떠났다. 의술에도 능해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추당에서 독서하고 글씨를 써 왔는데(我讀我書秋堂)젊어 읽고 늙어 읽어도 그 맛 끝이 없구나(少讀老讀味長)탐구한 마음 있어 그 맛 깨달았으니(知味了究心上)무소득이라 하지만 삶의 방향 얻었다네(無所得有術方)
공부에는 끝이 없다. 배워야 할 지식 자체가 무궁무진하기도 하지만, 같은 책을 읽어도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바가 자꾸 다르기 때문이다. 독서가 무슨 실익을 주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인간행동 최고의 덕목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걷는 사람의 비인간적 생애는 보는 이에게 참으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관직 진출 않고 평생을 학문에 바친 장현광
장현광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들을 키우는 데 바쳤다. 그는 늘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는데, 그 결과 "참다운 문은 반드시 무가 있고, 참다운 무는 반드시 문에 근본한다. 이미 문 밖의 무가 없고 또 무가 없는 문이 없으니, 무가 없는 문은 참다운 문이 아니며 문을 떠난 무는 참다운 무가 아니다. 문과 무는 하나의 길이다"와 같은 '문무일체론'을 펼쳤다.
남자가 천하를 유람할 때(男子遊天地)어찌 집 밖을 나설 필요가 있으랴(何須出戶庭)천지의 조화를 도움은 마음이 발라서고(參贊由心正)치국평천하는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서네(治平自婦刑)공부는 경(敬)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功無敬外大)이 한 글자가 바로 나의 명심할 바라네(一字是吾銘)
남자가 꼭 천하를 돌아다녀야 우주와 인간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올바르면 세상의 섭리를 알게 되고, 가정에서 아내에게 모범이 되면 나라의 큰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성심을 다해 맑은 정신을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이 공부의 왕도이자 첩경이다. 그 점을 잊지 않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으리라.
▲ ?읍청루(금오서원 누각)
ⓒ 김명희
사당 참배를 하고 돌아나오며 정학당(금오서원 본 강당) 마루 앞에서 서서 읍청루(서원 출입 누각) 너머를 응시하니 감천과 낙동강 쪽으로 펼쳐진 들판이 참으로 광활하다. 그 끝없이 넓은 전경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높은 고가도로가 요란한 자동차 굉음을 뿜어내고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금오서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면 먼저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야 되는데, 저 고가도로가 경관을 훼손하는 바람에 안 된다더군" 하고 소개한다.
그 말을 들으니 '서원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신작로를 개설했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생각이 용솟음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으면 국격이 올라가는 일 아닌가! 고가도로 이전 등 해결책이 강구되기를 희망해 본다.